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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야기

 

One boy brought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arley bread.....

한 소년이 생선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를 가져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자들이 굶주려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를 찾아 벳세다 들판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무리들을 먹일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리들을 마을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상황도 현실도 그 많은 무리들의 배를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습이 바로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사역의 문제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삶은 벳세다 들판의 제자들과 너무 흡사하게 닮아 있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 것에 대하여

저는 한 가닥 희망스런 일이 발생했음을 느꼈습니다.

분명 그 아이의 하찮은 음식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감히 그 음식은 모인 그 5천 명의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터무니없는 음식이었음이 분명 합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이 주님의 관심에 사용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꺼히...자신이 먹어야 하는 음식을 아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그 출발부터 드라마틱 합니다.

기적은 우리들이 생각하거나 상상 할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작은 움직음으로 부터 출발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 밖의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사람의 생각의 범주를 뛰어 넘습니다.

정말 이름 없는 한 아이의 하찮고 부실했던 음식 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나 토를 달지 않고 그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생명책인 성경의 놀랍고 경이로운 특별한 이적의 주인공으로 기록됩니다.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서 그의 섬김이, 그의 나눔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교회에서, 설교단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투영되고 비쳐졌습니다.

 

사람들은 도전을 서슴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섬김에 스스로를 뒤돌아 봅니다.

인간이 얼마나 진실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헌신하고 드리느냐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자신을 드리기에 힘쓰는 자는 그의 지위, 재능, 건강 여부를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큰 일을 목도 할 수가 있고, 그래야 그리스도의 나라의 한 분깃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벳세다 들판 한 이름없는 아이의 헌신을 통해 그 일이 어떻게 펼쳐지는 지는 우리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누가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까?

누가 그것을 놀라운 일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한 이름없는 어린아이의 순전한 섬김과 드림의 역사 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쓰시면 달라 집니다.

아이는 지금 우리들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수 없이 밀려드는 무리들을 보면서, 하루 이틀 어쩌면 더 길지도 모를 그리스도와의 시간에 목마르고 허기질지 모를

아이를 위해 온 정성과 사랑을 다해 싸 주신 그 어미의 간절함이 아이의 도시락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의 나라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애잔한 아프고 시린 사랑이 양념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아이의 도시락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도시락을 주님께서는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모여드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하시고 진리를 말씀하신 후, 바로 그 후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요한은 디베랴라는 지명을 서술함으로써 역사적인 지리를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디베랴는 헤롯의 아들인 안티파스가 갈릴 리 호수 곁에 마을을 신축하고 그 곳에 붙인 이름입니다.

요한은 역사성 있는 지명을 서술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역사의 한 가운데서

일하셨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사역의 모습을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보여 줍니다.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를 기억하고 살았습니다.

모여든 군중들... 그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과거 조상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들을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절망했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 갔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라 불려지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와 압제하에 지내는 것은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로 이끌려 갔을 때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한은 조상들이 그 광야에서의 경험했던 기억들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군중이 광야에 있는 장면을 요한은 종종 그의 복음서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기들 고대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소문과 그분의 하시는 말씀이 다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권위가 있고 달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어 주라고 고백 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차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향해 나아왔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표적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한다고 바울은 지적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의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의 교육을 받은 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먼 자, 절름발이 등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볼 때 그들에게도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소문을 낳고, 그 소문이 전해져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군중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와 같이 표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길 기대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교회들이 세상속에서 자기들에게 거룩한 표적을 보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뭔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잘 설명 할 수는 없지만 그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들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걸어 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님의 교회에 세상은 희망을 갖어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갖어 봅니다.

이 혼란스럽고 부끄럽고 무지 막지한 이세상을 변화시키고 다르게 만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교회들이라고, 그들은 마음 속 가득히 기대하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적에 너무 인색합니다.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자기들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말합니다.

외식으로 가득차도 너무 가득차서 우리들의 실체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침을 밷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다고 교회를 바라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외면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큰 방해꾼들과 훼방자들은 바로 오늘 우리들 주변의 교회들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을 발견 합니다.

저 역시 그 부분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요, 목회자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도 우리들도 세상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감히 그리스도의 표적을 세상에 보여줄 용기도 담대함도 믿음도 열망도 없습니다.

 

세상의 관심은 먹을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필요는 일용할 양식 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해결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표적이 그들의 목전에서 배설되어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런측면에서 사회에 표적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헌신하고 섬기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목적은 조금 더 고상한 목적이어여 합니다.

그것은 지역의 교회들이 그 지역의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성경의 말씀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활용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상에 주는 것은 인색해도 너무나 인색합니다.

목사들은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양 합당하게 여깁니다.

목사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목사니까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존경받고 대우받고 사랑받고 사는 사람들 중에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입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라고 가르칩니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과한 사례비를 받으면서 국가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내는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돈을 밝히는 것의 경주가 있다면 목사들이 아마도 1등으로 골인 할 것입니다.

더럽습니다. 정말 구역질이 납니다. 나도 또한 목사라는 것이 이때는 정말 싫어 집니다.

부끄러워 집니다. 용서하기 싫어 집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다른 모습을 기대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들과는 뭔가 조금은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표적을 갈망합니다.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나는 수도 없이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귀가 따갑도록 듣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무리가 많아지고 주님이 계신 곳에는 군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혼이 갈급할 때 진리의 생명 말씀을 전하시고

아픈 자를 치료하시는 기적을 행할 뿐 아니라 그들이 주렸을 때 먹을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서 그들은 부족함이 없이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벳세다 들판에 유대인 군중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아십니까?

실제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주변의 사람들, 이웃들, 잃어버린 바 된 자들 모든 의식주의 생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먹을 것만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은

세상중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바울의 사역을 흉내내고 영적 권위들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게으름과 그들의 부르심에 대한 직무유기를 가만히 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운행하심을

그들의 선조로부터 배웠거나 율법책인 토라를 듣고 읽어 잘 압니다.

그들의 의식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는 능력 행함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오지 않으면 그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부활의 능력으로 제자들이 무릎을 꿇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합니다.

따라서 주를 그리스도라 믿는 우리들은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에 참예키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명절로 유월절을 지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박과 신음 속에서 모세의 인도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속죄제의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죄제의 배경이 있는 유월절을 의미 있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시려는 일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킴으로

계속적으로 속죄해야 하는 일을 단번에 대속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논박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으며,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하시며, 군중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자 산에 오르시고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시고 싶거나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원하실 때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교훈도 산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것은 한적한 곳에 머물러 유월절까지 쉬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향하여 찾아 오게 되었고

이에 예수님은 다시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어 우리의 계획이 예상하던 것과 다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섬김은 세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섬김은 믿지 않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나눔은 바로 그들을 향한 나눔 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을 말씀 하실 때 일어버린 자들을 찾아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의 집중이 세상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교회들의 관심의 집중이 바로 세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외치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목사들은 강단에서 세상과 벗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그냥 우리들끼리 끼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라고 말해 줍니다.

성도들끼리, 그리스도인들끼리 오염되지 않는 세상사람들과 조금은 분리하여 거룩하게 살야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지내면 우리들을 속되다 말하고 죄악에 물들어 간다고 말합니다.

빛이 어찌 어둠을 사랑 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너무나도 상충된 복음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거짓 진리를 두려움 없이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세상이 등을 돌립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고 기독교인들을 싫어 합니다.

정치판에 뛰어들고 교회가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목사들이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더러워 지는 징조들입니다.

아.. 정녕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사단이 흔드는 노랫감으로 전략하고 마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그 중심에 목사라는 이름으로 탈을 쓰고 혼돈을 주고 있는 일부 정치 목사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놀이들이 악취가 나서 구토가 일어 납니다.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다운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시 조금은 흥분되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자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이가 화목하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화목제의 의식을 드린 후 충만하고 자유로운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큰 명절이었으며, 또한 희생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유월절은 모형이었고 그리스도의 대속이 실제임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구름 때처럼 모여든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어야 하는 관심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늘 우리들의 주님의 교회들이 갖어야 하는 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안믿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보셨습니다.
목전에 무엇이 있으며 어떠한 형편이 일어나는지 보려 함이셨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들은 그렇게 세상을 주시 할 수 있어여 합니다.

하나님 만큼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신 분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은 세상 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드셨을 때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실 때 이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는 장엄하고도 믿음에 차 있는 모습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드셨을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으셨을 때 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믿음의 친구들이여!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심정으로 눈을 들어 회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볼 수 있어여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얼마 있다가 언제 내려오셨는지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그 시각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다시 병든 자를 낫게 하셨다는 기록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만 무리가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무리가 메시야를 향하여 밀려오듯이 오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는 움직임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아셨기 때문에 제자인 빌립에게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한 애정을 가지고 빌립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셔서 무리에게 향하는 긍휼을

제자들이 함께 느낄 수 있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고픔 가운데 있음을 제자들에게 인지 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는 사랑과 긍휼을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이 함께 체험하기를 바라십니다.

 

현장에는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했습니다.

데나리온이란 로마 시대에 사용한 로마의 화폐 단위로써 1 데나리온은 보통 한 사람의 하루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그 환산법으로 계산하여 볼 때 일일 평균 임금이 오만 원에서 칠만 원이라면

이백 데나리온은 천만 원에서 천사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액수는 세대마다 다르게 환산이 되더라도 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물음을 듣고 즉시 그 많은 무리를 수리 적으로 셈하고

물가의 기준을 대응하여 값을 계산해 본 후 주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 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것은 빌립의 자연스러운 대답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벳새다 지방의 주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도저히 우리 형편 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합리적인 계산도 진정 문제에 직면했을 경우에는 아무런 해답 을 주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빌립이 계산을 지나치게 했는지 혹은 조금씩 받게 하여 적게 계산을 했는지는

요한이 디테일 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빌립은 정확하게 최소한의 경비를 생각 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안드레가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먹을 것을 무리들에게 먹게 하라 하신 것을 듣고

그 무리 중에서 음식을 찾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안드레가 활동성 있는 주님의 제자였던 것은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한 아이에게서 음식을 받아 주님께로 옵니다.

한 아이가 안드레에게 준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 보리떡은 값싼 종류의 떡이며 구운 떡 입니다.

물고기도 그 당시에 쉽게 갈릴리에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소년은 아마 가난한 집안의 어린 아이였을 것입니다.

당시로 볼때 그것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음식 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드레는 그 소년의 음식을 기꺼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가져온 것은

모여 있는 군중들 틈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허기질 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어미는 아들을 위해 최선의 것을 준비해 주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이 작은 음식을 주님께 가져 가면서도 그것이 그 많은 사람에게

무슨 필요를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하여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소년이 주님에게 드리는 작은 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 섬김이, 그 드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보여 줍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실로 그 많은 무리에게는 너무나도 작은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 마나 되겠삽나이까, 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는 주님께서 어느 정도 그들의 필요들 채워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안드레 다운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요한은 안드 레들 제자 중 하나란 소속을 분명히 함으로써

제자가 예수님께 대해야 하는 자세를 설명합니다.

빌립은 주님께 역시 인정받는 자이나 지금 상황에서 제자의 모습이라기보다

셈을 빨리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제자 된 모습은 적은 것이라도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뢰하며 그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안드레가 그랬습니다.

 

주님의 제자 안드레가 한 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가져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적은 양의 음식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까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누구 코에 붙이라고...? 아마도 도는 사람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음식을 받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잔디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비록 적은 양의 음식이었지만 간절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행동하시는 주님의 특별함을 봅니다.

작은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세를 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서 조차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우리들이 신앙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여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이 축사는 그 음식의 질이나 양, 그리고 맛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든 만물을 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것의 열매를 먹고 마실 수 있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주님의 이런 감사는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자만이 겸손의 비밀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가 주님 앞에 내어 놓은 음식은 당시 가난한 백성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한 아이의 보잘것없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드렸습니다.

결코 안드레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것을 주님께 아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안드레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무리의 원대로 떡과 고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 음식을 받은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무리들은 세상의 어떤 만족보다도 충분한 만족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라고 말입니다.

 

오천 명이라는 하는 많은 군중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고 난 후에

예수님은 그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고 거두어 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군중 속에 들어가 거두어 들인 음식 조각들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풍족하게 먹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작은 것이라고 하여도 주님께 드려진 것은 언제나 풍족함으로 가득합니다.

 

오병이어의 저금통은 벳새다 들판의 한 어린 아이의 음식이 주님을 통해 보여준 사실에 근거합니다.

저는 이 믿음에 대해서, 이 환상과 비전과 꿈에 대해서 들려 드릴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립니다. 저금통이 만들어져서 오천명의 군중들에게 배부름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적의 한 중심에 서서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간증하고 싶습니다.

그런 소망으로 가득한 10월의 첫날 입니다.

 

 

  • ?
    이민섭 2019.10.01 21:38

    오늘도 저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 날마다 좋은 글 길게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
    읽느라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은혜되어 한자 한자 빠뜨리지 않고 읽고 있습니다.

    목사님 쉬어가면서 하세요...어휴....사랑합니다.


한 소년의 꿈

One boy brought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arley b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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